제9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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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9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는 1971년 6월 27일에 실시되었으며, 선거권자는 71,177,667명이었다. 소선거구제, 중선거구제, 대선거구제를 혼합하여, 지역구 75석과 전국구 50석을 선출했다. 선거 결과 자유민주당이 가장 많은 의석을 확보했으며, 투표율은 지역구 59.24%, 전국구 59.23%를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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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선거 정보
1971년 6월 27일에 실시된 일본 참의원 선거는 참의원 의석의 절반을 선출하기 위해 진행되었다.[1] 이 선거에서는 자유민주당이 가장 많은 의석을 차지했다.
사토 에이사쿠(佐藤栄作) 총리가 이끌던 자민당은 오키나와 반환 협상 타결과 오사카 만국 박람회 성공 등의 긍정적인 요인에도 불구하고, 이번 선거에서 1956년 이후 최저 의석(63석)과 당 창당 이래 최저 득표율을 기록하며 예상보다 부진한 결과를 얻었다.[4]
이는 사토 장기 집권에 대한 국민들의 피로감이 반영된 결과로 해석되며,[3] 보혁 伯仲 (보수와 혁신 세력이 팽팽하게 맞서는 국회) 상황의 도래를 예고하는 신호탄으로 여겨졌다.
2. 1. 투표일
1971년 6월 27일2. 2. 선거권자
'''71,177,667'''명2. 3. 선거 제도
제9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는 지역구와 전국구(비례대표)로 나누어 의원을 선출하는 방식이었다. 선거는 비밀투표로 진행되었으며, 20세 이상 남녀에게 선거권이 주어졌다.[5]2. 3. 1. 지역구
지역구는 소선거구제와 중선거구제를 혼합하여 운영하였다. 소선거구제는 26개 선거구에서 각 1명씩 총 26명을 선출하였고, 중선거구제는 2인 선거구(26개, 각 1명 선출), 4인 선거구(15개, 각 2명 선출), 6인 선거구(4개, 각 3명 선출), 8인 선거구(2개, 각 4명 선출)로 총 50명을 선출하였다.[5]2. 3. 2. 전국구 (비례대표)
全国区일본어는 전국을 하나의 선거구로 하여 50명의 의원을 선출하는 대선거구제였다.[5] 총 유권자는 71,177,667명으로, 남성 유권자는 34,412,000명, 여성 유권자는 36,765,667명이었다.[5]2. 3. 3. 기타
비밀투표로 20세 이상 남녀에게 선거권이 부여되었다.[5] 유권자 수는 71,177,667명(남성 34,412,000명, 여성 36,765,667명), 후보자는 총 305명(지역구 199명, 전국구 106명)이었다.[5]3. 주요 쟁점
사토 에이사쿠 총리의 자민당은 전년에 큰 표차로 4선을 달성했고, 오키나와 반환 협상 타결, 오사카 만국 박람회 성공, 1970년 안보 투쟁과 대학 분쟁 극복 등 선거전에서 큰 불안 요소는 없었다. 아사히 신문의 여론조사에서도 의석 증가를 예상했다.[4]
하지만 이듬해 퇴임이 결정된 사토 장기 집권에 대한 "싫증"이 표면화되었고,[3] 보혁 백중 상황의 도래를 예감하게 하는 선거 결과가 나왔다. 결과에 대한 불만은 자민당 참의원 집행부와 시게무네 유조 의장에게 향했고, 시게무네의 의장 사퇴와 코노 켄조의 취임으로 이어졌다. 코노는 다나카 가쿠에이와 친분이 있어 이 참의원 선거가 이듬해 총재 선거에 미친 영향도 적지 않았다.[4]
4. 선거 결과
1971년 6월 27일에 실시된 일본 참의원 선거에서는 자유민주당이 가장 많은 의석을 차지하였다.[1]
자유민주당은 62석, 일본사회당은 39석, 공명당은 10석을 얻었으며, 민주사회당과 일본공산당은 각각 6석을 획득하였다. 무소속은 2석을 차지했다. 선거 후 자유민주당은 134석, 일본사회당은 66석, 공명당은 23석, 민주사회당은 13석, 일본공산당은 10석, 무소속은 5석으로 의석 분포가 조정되었다.
4. 1. 투표율
4. 2. 정당별 득표 결과
4. 2. 1. 전국구 (비례대표) 득표 결과
4. 2. 2. 지역구 득표 결과
4. 3. 정당별 의석 결과
제9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에서 자유민주당은 62석, 일본사회당은 39석, 공명당은 10석, 민주사회당과 일본공산당은 각각 6석을 얻었으며, 무소속은 2석을 획득하였다. 선거 후 자유민주당은 134석, 일본사회당은 66석, 공명당은 23석, 민주사회당은 13석, 일본공산당은 10석, 무소속은 5석을 차지하게 되었다.[1][2]
4. 3. 1. 정당별 당선자 수
4. 3. 2. 지역구별 당선자
4. 3. 3. 전국구 (비례대표) 당선자
야마모토 이사부로(1971년 7월 8일), 무라카미 코타로(1971년 9월 8일) 의원 사망에 따름.[1]
4. 4. 주요 정당
5. 선거 이후
사토 에이사쿠 총리가 이끌던 자민당은 오사카 만국 박람회를 성공적으로 개최하고 1970년 안보 투쟁과 대학 분쟁을 극복하는 등, 선거를 앞두고 큰 불안 요소는 없었다. 아사히 신문의 여론조사에서도 자민당의 의석 증가를 예상했다. 그러나 실제 선거 결과, 자민당은 63석을 얻는 데 그쳐 1956년 이후 최저치를 기록했고, 득표율 또한 당 창당 이래 가장 낮았다.[4]
이는 이듬해 퇴임이 예정되어 있던 사토 총리의 장기 집권에 대한 국민들의 "싫증"이 표면화된 결과였으며,[3] 보혁 伯仲 상황, 즉 보수와 혁신 세력이 팽팽하게 맞서는 국면이 도래할 것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선거 결과에 대한 불만은 자민당 참의원 집행부와 참의원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던 시게무네 유조 의장에게 집중되었고, 결국 시게무네는 의장직에서 사퇴하고 고노 겐조가 새 의장으로 취임하게 된다. 고노 겐조는 다나카 가쿠에이와 친분이 있었기 때문에, 이 참의원 선거는 이듬해 총재 선거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4]
이후 치러진 보궐선거 결과는 다음과 같다.
5. 1. 정계 개편
사토 에이사쿠(佐藤栄作) 총리가 이끌던 자민당은 오사카 만국 박람회를 성공적으로 개최하고 1970년 안보 투쟁과 대학 분쟁을 극복하는 등, 선거를 앞두고 큰 불안 요소는 없었다. 아사히 신문(朝日新聞)이 실시한 여론조사에서도 자민당의 의석 증가를 예상했다. (『아사히 신문』1971년 6월 25일자). 그러나 실제 선거 결과, 자민당은 63석을 얻는 데 그쳐 1956년 이후 최저치를 기록했고, 득표율 또한 당 창당 이래 가장 낮았다.[4]이는 이듬해 퇴임이 예정되어 있던 사토 총리의 장기 집권에 대한 국민들의 "싫증"이 표면화된 결과였으며,[3] 보혁 伯仲 상황, 즉 보수와 혁신 세력이 팽팽하게 맞서는 국면이 도래할 것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선거 결과에 대한 불만은 자민당 참의원 집행부와 참의원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던 시게무네 유조(重宗雄三) 의장에게 집중되었고, 결국 시게무네는 의장직에서 사퇴하고 고노 겐조(河野謙三)가 새 의장으로 취임하게 된다. 고노 겐조는 다나카 가쿠에이(田中角榮)와 친분이 있었기 때문에, 이 참의원 선거는 이듬해 총재 선거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4]
5. 2. 보궐선거
참조
[1]
웹사이트
Table 13: Persons Elected and Votes Polled by Political Parties - Ordinary Elections for the House of Councillors (1947–2004)
http://www.stat.go.j[...]
2011-03-23
[2]
웹사이트
27-11 Allotted Number, Candidates, Eligible Voters as of Election Day, Voters and Voting Percentages of Ordinary Elections for the House of Councillors (1947-2004)
http://www.stat.go.j[...]
2006-01-04
[3]
웹사이트
佐藤政権へ“飽き”(1971年6月27日投票)
https://web.archive.[...]
2017-07-24
[4]
논문
参議院自民党における閣僚ポスト配分ルールの形成
2001
[5]
웹사이트
参議院議員通常選挙の定数,立候補者数,選挙当日有権者数,投票者数及び投票率(昭和22年~平成16年)(エクセル:48KB)
http://www.stat.go.j[...]
[6]
웹사이트
参議院議員通常選挙の党派別当選者数及び得票率(昭和22年~平成16年)(エクセル:80KB)
http://www.stat.go.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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